<정직>은 전적으로 습관에 의합니다.
때문에 정직은 어릴 때 부터 습관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정직에 있어서 만큼은 더욱 심각하게 다가옵니다.
이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돌이켜 보아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커서 깨닫고 정직하려 해도 쉽지 않더란 얘깁니다.
알고 노력을 하지만 갈등을 거쳐야 한다는 건 불행입니다.
정직한 아이로 잘 양육하는 건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정직하려고 애를 쓸 필요없을 정도로 버릇을 들여 놓으면
결국 무엇보다 귀중한 유산을 물려준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정직과 관련해서는 아이들에게 철저한 편입니다.
...........
정직이 삶을 선순환으로 만들어 주는 이유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피곤함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저버린 말이나 행동은 반드시 합리화와 숨김을 위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아내나 남편에게..부모에게, 자녀에게, 친구에게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위장하기 위해 또 다시 부정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꾸 합리화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바울사도 말씀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억하실 겁니다.
"내가 뜻하는 선을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내가 뜻하지 않는 악을 내가 행하게 된다."
부정직을 의미합니까?
선을 행할 의지가 전혀 없거나 무관심해서,
또는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양심의 가책 없이 행한다면, 물론 부정직한 사람이지요.
아니, 이보다 훨씬 나쁜 파렴치한 인간이겠습니다. 그러나,
선에 대해 노력하는 사람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부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선을 인식했고 죄책감을 느꼈다면 정직한 사람이지요.
저는 이 말씀에 위안을 받고 힘을 얻어 포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는데...내가 어찌...'
수치심과 달리 죄책감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란 생각입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정직> 아니겠습니까?
물론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 선물이 아닙니다. 사단의 역사라 할 수도 있지요.
정직을 알지만 행하지 못했으므로 애통해 하게 되고,그러나 주님 안에서 고백하고 위로 받고...
반복되면서 밖으로도 점차 정직해지리란 기대감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좋은 습관이 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희망적입니까.
아이들을 정직하게 키운다는 것은 솔직하게 키우는 게 아니라 양심있게 키우는 것이지요.
습관에 의해서....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