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보면 열린 문을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이 구절들을 얼핏 보면, 하나님이 열린 문을 주시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실행하겠다는 내용처럼 보입니다.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리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행 14:26~2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전 16:8~9)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골 4:3)
하지만 앞에 나오는 구절들은 모두 전도에 대한 것들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퍼뜨리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일이 자신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구절들은 단순히 열린 문을 달라거나, 문이 열렸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전하도록 문을 열어 달라는 것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전도는 열린 문, 닫힌 문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따라서 앞의 구절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전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려 달라는 분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너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후 2:12~13)
앞의 구절은 열린 문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 이르렀는데 주 안에서 문이 열렸습니다. 문이 열렸으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도가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해 심령이 편치 않다는 지극히 개인적(?) 이유로 열린 문을 두고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다음 구절은 그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 7:58~7)
바울은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여러 문제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디도로부터 듣고 싶었는데, 그를 만나지 못하자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염려로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심령이 편치 못한 바울은 마게도냐로 갔고, 거기서 디도를 만나 고리도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열린 문을 이용하지 않은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입니다. 이들이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자 엄청난 지진이 발생해 감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사람을 묶은 것이 다 벗겨졌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이 상황을 감옥에서 도망가라는 열린 문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곳에 남았습니다. 자다가 깬 간수는 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죄수들이 다 도망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소리를 질러 자살을 막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간수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바울과 실라가 감옥 문이 열린 것을 '열린 문'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열린 문이 곧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열린 문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경우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단순하게 열린 문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자기의 욕심을 열린 문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합리화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별력과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스스로를 단순한 이분법의 기계로 만들지 말고 높고,깊고,넓게 분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출처:<내 뜻인가, 하나님 뜻인가/정요석>
*예고 : 믿음이 있는 자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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