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 중에 <내일>이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을 가리키는 우리말은 분명히 있건만 <내일>이란 우리말이 없어
오늘까지도 우리는 한자어 내일(來日)을 빌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점심을 뜻하는 우리말이 없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먹는 밥을 우리말로 아침이라 부르고 저녁에 먹는 밥 역시 저녁입니다만
아침과 저녁 중간에 정기적으로 먹는 밥을 이르는 우리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한자어 점심(點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내일>과 <점심>이라는 고유의 말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사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전통적으로 하루에 두 끼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할 정도로 가난하였습니다.
찢어질 정도로 가난하기만 하였으니 내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직 있다면 눈물겹게 헤쳐 나온 어제와, 또 다시 뚫고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가난한
오늘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다 보니, 형편이 나아져 하루 세 끼에 그 사이 참까지 먹으면서.....
점심과 내일이라는 남의 말을 쓰게 된 지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여전히 과거지향적입니다. 내일을 향한 시선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 한번 사이가 뒤틀어지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구원(舊怨)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 땅의 정치 지도자들이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것 또한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한국 교인의 신앙생활에는 간증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간증을 듣는 것이나 자신이 직접 간증하는 것을 모두 은혜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증이란 내일에 대한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간증은 지나간 과거에 자신의 삶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입니다.
내일이 없었던 우리 민족이 아직까지 과거지향적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 크리스천이 간증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 간증이 <내일>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방금 은혜로운 간증을 마친 사람이 그 직후 뜻하지 않은 사건을 만났을 때
쉽게 절망에 빠지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접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어제의 믿음이 오늘, 더 나아가 <내일>로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위해 친히 빚고 계시는
<내일>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하나님만 믿으려는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 없습니다.
어제의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계시며,
<내일> 또한 나의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언제나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참된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을 위해 빚으시는 <내일>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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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신실하게/ 이재철목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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