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크리스천

고린도전서 14장을 중심으로한 방언 고찰(2)

malmiama 2024. 12. 12. 10:30

4. 방언의 정의



국어사전에서는 (1) 한 언어에서 사용 지역 또는 사회 계층에 따라 분화된 말의 체계, (2) 사투리, (3) 신약 시대에 성령에 힘입어 제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외국 말을 하여 이방인을 놀라게 한 말 또는 황홀 상태에서 성령에 의하여 말해진다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말.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방언의 의미 중에 현대 기독교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는 방언 은사의 의미는 (3)과 같은 의미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 부여는 지나치게 과장되고 첨가된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 방언으로 번역된 glw'ssa(글로싸)는 ‘혀(몸의 말 하는 기관)’, ‘말(다른 나라들의 말과 구별되는 특정한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방언 그 자체로서는 위와 같은 문장이 성립될 수 없는 단순한 명사이다. 그러므로 원어의 뜻을 살펴 보건대 ‘언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5.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방언 은사



가. 마가복음



(1) 16장 17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부활과 재림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확실성을 보여주시는 표적으로 “새 방언들로 말하게 될 것(glwvssai" lalhvsousin kainai'")”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방언들로 말하는 것은 ‘표적(標的)’으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을 확증하는 표적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또한 방언들로 말함은 사도들의 메시지의 출처가 성령이심을 증명하는 중요한 표적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나. 사도행전



(1) 2장 4, 6, 8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오순절은 유대인들의 3대 절기 중에 하나인데, 이 시기에 각 지역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 그리고 외국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다.(행2:5) 제자들과 여러 그리스도인들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진 곳에 모여서 기도에 힘쓰던 상황이었다.(행1:14) 그러던 중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큰 무리(행2:2)들의 각 출신지역의 언어로 말을 하였다. 그 지역의 언어들을 알아들은 사람들은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그레데인, 아라비아인들과 메소보다미나,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구레네, 리비야 여러 지방과 로마에서 온 외국인들이었다. 이스라엘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아닌 외국에 거주하며, 외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12장 이하에 베드로의 설교에서 드러나는 대로 요엘서(2:28-32)에 미리 예견된 것의 성취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림으로 육체가 되어버린 이 땅의 인간들에게 새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이 땅의 육체들에 임하시는 구원 역사의 시작과 완성에 대한 표적으로 ‘방언’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는 멀리로는 창세기 바벨탑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언어가 혼잡하게 되는 저주에서 풀려나고 이제는 자유하게 되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구원 사역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이나 다른 어떤 이방인이라도 그 신분에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딤전2:4)는 하나님의 뜻을 재천명(再闡明)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으신다는 이 사건은 우리(이방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일인 것이다. 유대인들의 사고에서는 이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정도의 일이다.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항상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인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아주 잘 알 수 있다.(행11:8)



구약성경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묘사된다.(출 24:10, 32:27, 34:23, 민16:9 등)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방언 표적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원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도행전 10장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2) 10장 46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제는 사도들뿐만 아니라 이방인(외국인)들까지도 방언(외국어)을 하게 되었다.(행10:45,46) 이방인들이 외국어로 하나님을 높이는 일을 목격한 베드로는 놀랐다.(행10:45) 왜냐하면 방언(외국어)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성령께서 임하심’, ‘성령을 부으심’으로 인한 일이었고, 이는 곧 오순절에 있었던 메시지와 같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외국인)도 차별 없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이자 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사도행전 11장에는 베드로의 환상 계시를 통하여 사도행전 2장, 오순절의 방언(외국어)과 사도행전 10장의 방언(외국어)이 이방인(외국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밝혀 주는 사건이었음을 말하는 내용이 등장한다.(행11:1-18) 이후에 등장하는 사도행전 19장의 방언(외국어) 또한 사도행전 2장과 10장의 메시지와 동일한 것이다.



(3) 19장 6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예수의 이름이 아닌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행19:3)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잘못된 신앙이 그들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요한이 전파한 것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가르쳐 주고, 예수의 이름을 전하여 믿게 한 후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합당함을 표증(表證)하시는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셨다. 그때에 성령이 그들이 구원을 받은 표적으로 방언을 말하게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 19장 6절에서의 방언의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의 능력자가 되심과 에베소(이방인)사람도 구원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6. 방언 은사의 본질(本質)



먼저 방언 은사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방언 은사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선행되어져야 할 부분은 방언 은사가 어떤 방식으로 행해지는 은사인가 하는 부분이다. 방언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행했던 것과 같이 외국어들로 말하는 방식으로 행해지는 것인가, 아니면 고린도교회의 교인들과 현대 기독교인들이 행하고 있는 것과 같이 비언어적인 형태의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로 기도하는 방식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다시 말하자면 방언은 ‘언어 구사의 은사’인가 아니면 ‘기도 은사’인가 혹은 ‘둘 다’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가. 방언의 용례(用例)



‘방언’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 glw'ssa(글로싸)와 diavlekto"(디알렉토스)로 표현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약성경 전체에 방언이 표현된 부분은 25구절인데, 이 중 2구절(행 2:6절과 2장8절)에는 diavlekto"(디알렉토스)로 표현되어 있고, 나머지 23개 구절에는 glw'ssa(글로싸)로 표현 되어 있다. 이 두 단어는 ‘언어’라는 같은 뜻을 가진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이다. 다른 단어이지만 의미가 같다. 그리고 누가는 사도행전 2장 4절, 10장 46절, 19장 6절에서 glw'ssa(글로싸)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것을 볼 때 누가는 의도적인 의미 구분을 위하여 다른 단어를 사용했다기보다는 단순 혼용(混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 마가복음과 사도행전 외에 방언을 언급하는 유일한 성경은 고린도전서이다. 고린도전서에는 방언이 glw'ssa(글로싸)라는 한 단어로만 표현이 되어 있다.



반면에 신약성경에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내용은 고린도전서 14장 14절 단 한 곳 외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 단 한 차례 외에는 신약성경에서 방언과 관련하여 표현하는 모든 부분은 ‘방언으로 말하다’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방언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약 성경 전체(마가복음, 사도행전,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말하다’와 ‘기도하다’ 중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순서

성경 구절

원어

개역개정

흠정역(KJV)

1

마가복음 16장 17절

lalhvsousin

말하며

speak

2

사도행전 2장 4절

lalei'n

말하기를

speak

3

사도행전 2장 6절

lalouvntwn

말하는

speak

4

사도행전 2장 8절

·



5

사도행전 10장 46절

lalouvntwn

말하며

speak

6

사도행전 19장 6절

ejlavloun

말하고

spake

7

고린도전서 12장 10절

·

말함을

·

8

고린도전서 12장 28절

·

말하는

·
9

고린도전서 12장 30절

lalou'sin

말하는

speak

10

고린도전서 13장 1절

lalw'

말을

speak

11

고린도전서 13장 8절

·



12

고린도전서 14장 2절

lalw'n

말하는

speaketh

13

고린도전서 14장 4절

lalw'n

말하는

speaketh

14

고린도전서 14장 5절

lalei'n

말하기를

speaketh

15

고린도전서 14장 6절

lalw'n

말하고

speaking

16

고린도전서 14장 13절

lalw'n

말하는

speaketh

17

고린도전서 14장 14절

proseuvcwmai

기도하면

pray

18

고린도전서 14장 18절

lalw'

말하므로

speak

19

고린도전서 14장 19절

lovgou"(lalh'sai)

말(설교)하는

words

20

고린도전서 14장 21절

lalhvsw

말할지라도

speak

21

고린도전서 14장 22절

·

·

22

고린도전서 14장 23절

lalw'sin

말하면

speak

23

고린도전서 14장 26절

·

24

고린도전서 14장 27절

lalei'

말하거든

speak

25

고린도전서 14장 39절

lalei'n

말하기를

speak


위의 표와 같이 신약성경(요한계시록 제외) 안에 총 25개의 방언과 관련된 구절 중 명사형으로 기록한 4개의 구절을 제외한 모든 구절에서 방언은 ‘말하는 은사’, lalevw(랄레오)로 기록되어져 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고린도전서는 “교정서신(矯情書信)”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은 부정문(否定文)이다. ‘방언기도(proseuvcwmai glwvssh/)’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구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방언 은사로 제시되는 유일한 형태는 사도행전의 ‘외국어들로 말하는 것(speech)’이며, 기도 형태의 방언 은사는 14장 14절 이외에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에 방언 은사는 ‘외국어들로 말하는(speech)’ 한 가지 형태만 존재한다. ‘방언 기도(pray)’를 유일하게 언급한 곳인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으므로 기도(pray)형태의 방언 은사 추구(시도)는 잘못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와 같인 방언 은사를 오용(誤用)하는 것이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던 방언 은사 문제였다.



방언이 ‘기도하는 은사’, proseuvcwmai(프로슈코마이)로 기록되어 있는 곳은 고린도전서 14장 14절 단 한 군데 뿐이다. 그렇다면 방언 은사가 어떤 형식인지를 확인하는 일에 있어서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의 의미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이 어떠한 의미인지에 따라서 방언의 방식(형태) 규정의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의 해석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자세하게 논하고자 한다.



나. 방언의 오용(誤用)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바른 방언 은사가 아니다. 현대 기독교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방언 은사는 ‘뜻을 알 수 없는 불규칙한 음절이나 어절의 반복을 통한 기도’로 행해지고 있다. 만약 방언 은사가 그러한 소리로 하는 기도라면 그리고 그것이 현대의 방언이라면 고린도전서 14장은 모순에 빠지고 만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방언 기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방언 기도’를 인정 혹은 독려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모순이 있게 된다. (이하는 고린도전서 14장의 구절들이다.)



첫째, 통역을 시도하는 것이 모순이 되고 만다.



방언 은사가 ‘방언으로 하는 기도’라면 통역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26절) 기도를 통역한다는 것은 개념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기도는 통역의 대상이 아니다. 기도의 유일한 대상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기도의 유일한 수렴자(收斂者)이시자 응답자이신 하나님이 들으시면 충분한 것이다. 기도자의 기도는 사람이 들을 필요가 전혀 없으며, 기도를 통역한다는 개념은 성경에서 시도된 바가 없다.



‘통역’이라는 것은 의사 전달이 불가능한 상태 즉 청자(聽者)가 화자(話者)의 의사 전달을 청취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때에 필요한 것이다. 청자(聽者)가 화자(話者)의 의사 전달을 충분히 들을 수 있거나 이해 할 수 있다면 통역이라는 것은 전혀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고 전능(全能)하신 절대자(絶對者)이시다. 기도는 그런 하나님을 대상으로 올리는 간구이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통역이 필요 없다.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기도의 수렴자(收斂者)가 확실히 듣고,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 또는 인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와 통역은 병립(竝立)이 불가능한 개념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3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닌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통역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듣는 이들이나 말하는 이 모두 야만인이 되게 하지 않고(11절),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12절). 하나님께 하는 기도에 통역을 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방언 은사가 방언 기도라는 정의는 오류이며 잘못된 정의이다.



이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14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14절은 방언 기도를 소개하고 있는 평서문(平敍文)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중대한 방언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부정문(否定文)이다. 14절에서 지적하고 있는대로 마음(지성, 사고, 생각)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문제가 중대한 오류가 아니라면 부정문으로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통역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



고린도전서 14절을 평서문으로 해석했을 때 마음(지성)이 이해하지 못하여 열매가 없을지라도 ‘영은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14장 28절에서 바울이 그것을 금지한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된다.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4절을 강한 부정문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14절을 부정문으로 해석 하지 않고, 평서문으로 해석 할 때는 모순에 빠진다. 평서문으로 해석한다면 “방언 기도는 영이 기도하고, 마음에는 열매가 없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통역이 굳이 필요 없다. 하지만 바울은 통역이 있을 때에만 교회에서 방언으로 말하라고 했다.(28절) 방언 은사에는 반드시 통역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통역이 없어서 알아들을 수 없으면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방언 은사가 기도라면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긍정문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긍정문 혹은 평서문으로 해석한다면 모순에 빠지게 된다. 비밀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알아 낼 수 없는 실체 혹은 감추어져서 다른 이에게 알리지 않을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비밀을 통역 할 수 있으며, 통역을 시도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인데 회중이 그 내용을 알아야 하는가? 그럴 수도 없다. 비밀로 하는 기도를 통역하여 공개한다면 그 자체로 모순이다.

둘째, 바울은 방언 기도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15절)



방언 은사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라면 바울은 방언기도에 대한 대안(代案)을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안이라는 것은 기존의 것을 대체하는 방안이다. 반드시 가용(可用)되어야 할 것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부적합하여 불가용(不可用)적인 것으로 판단되었을 때에 사용 중지 또는 폐기 후 가용(可用)의 조건을 이루기 위하여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안(代案) 제시는 기존의 것에 대한 중지 또는 폐기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그러므로 방언 은사가 기도하는 은사라면 대안(代案)을 제시하는 것은 필요 이상의 지나친 주문인 것이다. 단지 통역의 필요성만 언급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방언 기도의 대안(바른 기도 형태)을 명령한 이유는 방언 기도가 허위(虛位) 방언 은사였고, 기도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도 전혀 무익(無益)했기 때문이다. 방언 은사는 방언 기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셋째,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될 수 없다.(22절)



체계와 규칙을 갖추지 않은 음절이나 어절의 단순 반복 혹은 불규칙적이고 복잡한 소리로 하는 기도는 무엇의 표적이 될 수 있겠으며, 믿지 않는 자들은 그것을 보고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형태의 방언이 기독교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존재한 것이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마키(Robert G. Gromacki)에 의하면 “다른 종교(이교의 여제사장)에서도 방언이 존재하였는데, 교부 크리스소스톰은 악령에 사로잡힌 피도니스라는 여인이 방언을 했다고 증언하였다. 마르틴(Martin)은 오시리스(Osiris)교, 미드라(Mithra)교, 엘레우시스(Eleusis)교, 디오니소스(Dionysos)교, 오르페우스(Orpheus)교에 방언(무아경적인 말)이 유행할만한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시리아 여신 유노(Juno)의 열렬한 신자들이 했던 방언의 사례를 사모사타의 루키안(Lucian of Samosata, A.D. 120-198)은 보고했다. 그리고 키텔(Kittel)은 델픽 부르기아, 바시데스, 시빌즈에서 방언 현상들이 존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로마키(Robert G. Gromacki)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비기독교인들 가운데서의 방언 사건들이 이방 저작가들뿐만 아니라 또한 기독교 저작가들에 의해 보도되어 왔다. 이러한 사례들이 성경의 방언과 비슷한 점들이 있음은 아주 분명하다. 방언하는 사람은 종교적 예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신적인 존재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그는 그의 정신적 기능의 지배를 잃어버렸다. 그는 다른 언어로 말했고 거기에는 해석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방의 방언이 기독교의 방언으로 발전했다거나, 기독교의 방언은 이방 방언이 세련된 것이라고 추론해서는 안된다. 그 근원들은 정반대이다. 즉 하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사단이나 자아이다.”



“현대에는 이슬람교인들, 그린랜드 에스키모인들, 티베트 승려들의 방언이 존재한다고 전해지며, 2세기 이후부터 현재 기독교 역사에서는 몬타누스, 터툴리안, 힐데가드, 빈센트 페레르, 세베뇰의 선지자들, 잔센파, 퀘이커파, 어빙파, 쉐이커파, 몰몬교 등 신비주의적이고 이단적인 성향을 띄는 집단들에 한해서만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외에 정상적인 정통 기독교 내에서 방언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정통 기독교 내에서는 1900여년 동안 사라졌던 방언이 1900년대 초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넷째, 바울의 명령은 황당한 것이 되고 만다.(27절)



방언 은사가 기도라면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서 하라는 명령은 황당한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것인데 한 교회가 두 사람이나 세 사람만 정하여 차례대로 하는 것은 기도의 원리에 맞지 않다. 성경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 내용이다.



다섯째, 잘못된 기도의 양태(樣態)이다.



방언 은사가 기도라면 통역이 없는 상황에서 기도를 할 수 없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진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기도를 중재하는 중보자는 필요 없으며, 인간은 더욱 중보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방언 기도에 있어서 통역자는 그러한 중보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기도를 할 수 없도록 명령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방언 기도자는 통역이 없이도 교회에서 방언 기도를 한다. 하지만 성경은 통역이 진행되지 않으면 교회에서 사용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통역자가 부재(不在)하거나 통역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기도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방언 기도자는 통역자가 동석(同席)한 상태에서 기도를 하고, 통역자는 방언 기도자가 기도하는 것을 통역해야 한다면 참으로 이상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방언 기도자의 기도를 얼마만큼 통역해야 하며, 언제까지 통역해야 하는지도 불분명하다.



여섯째, 예수님의 가르침에 위배(違背)된다.



기도는 하나님께 은밀히 드릴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마6:6) 그러한 기도를 통역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성경은 다른 이의 기도 내용을 알라고 명령한적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여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고,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골방에서 기도 할 것을 명령하셨다.(마6:6) 방언 기도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명령에 부합하지 않는다. 기도는 통역할 필요가 없으며,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데, 바울은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바울은 방언 은사가 방언으로 하는 기도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방언 기도는 참된 방언 은사가 아니다.



방언 은사가 방언 기도라고 생각한 것은 고린도교회의 오류였다.(14) 그리고 현대 기독교의 오류이다. 방언 은사가 기도라면 오늘날의 방언 기도가 참 방언 은사라면 과연 그것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그 실용성과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고린도전서 14장과 같이 오늘날의 방언 기도가 성경에서 도출한 그 방언의 특성에 합치되는 것인지를 생각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기도는 간구, 아뢰고, 간청함으로 나의 전 존재가 드려짐과 또한 응답을 통하여 열매가 맺혀지는 귀한 은혜의 방편이다. 성경에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한 사례가 없다.

7. 방언의 특성



가. 이타성(고전14:16-19)



바울은 방언의 오용으로 인하여 다른 이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한 것을 부적절한 것으로 가르쳤다. 또한 방언 은사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다.(고전14:26) 방언을 일만 마디 할 수 있을지라도 타인이 깨닫지 못하면 은사로서 그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도 강조했다.(고전14:19) 그러므로 방언 은사는 나를 향한 은사가 아니라 철저히 타인을 향한 은사이다. 방언 은사로서는 나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교회의 유익을 도모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언 은사의 이타성은 방언 은사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나. 수평성(고전14: 9, 11, 12, 16, 17, 19, 22, 23)



방언 은사는 수평적이다. 수평적이라는 것은 은사의 구현과 목적이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반대적 의미인 수직적인 신앙 양태의 한 예는 ‘기도’이다. 방언 은사는 그것을 사용하는 자와 하나님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수직적인 은사가 아니다. 방언 은사는 그리스도인과 사람 특히 믿지 않는 자들과의 소통을 구현하는 수평적인 은사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방언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 했다고 기록된 구절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에 방언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 했다면 그것은 방언에 수직적인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방언에는 그런 수직성은 없다. 다만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은사를 부여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 특히 믿지 않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구현하는 것이 방언 은사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전적으로 수평적인 은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