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기가 부끄럽고 겸연쩍거나 폐를 끼쳐 마음이 거북하고 편하지 못한 상태를
'미안(未安)'이라고 합니다.
시중엔
'미안(未安)'보다는 '죄송(罪悚)'이란 단어를 쓰는게 예의처럼 되어있는데,
그 뜻은 '죄스럽고 황송'입니다.
'미안'보다
'죄송'에 보다 강한 뜻이 있긴합니다.
그래서 어른에겐 '죄송(罪悚)'을 쓰나본데, '죄스럽고 황송'하지도 않은데 존대말로
착각하여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지요.
'미안'이 결코 가볍거나 낮춤말이 아니겠기에 그렇습니다.
'생활속의 크리스천' 을 연재하면서
오랜기간 뿌듯했었던 게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읽으면서 재미있어 할 터이고... 간혹 좋은 영향을 받아
좋은 변화를 겪을 것이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삶 속에서 조금씩 성숙해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또다른 뿌듯함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영향과 변화와는 별개로 나와 내가정을 '부러워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부러워 한다는 것은 결코 좋은 게 아니라고 언젠가 칼럼에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남이 나를... 내
가정을 부러워하게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미안'한 일입니다. 오랜기간 가족의 이야기들이 주로
그랬습니다.
... '미안'합니다.
사실, 칼럼을 위한 소재를 많이 준비해서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족얘기 위주로 쓰다보니 '미안'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생각과 나눔'의 글이 될 수 있게 노력하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군요.
또 있습니다.
올해 바쁘다는 이유로 블러그에 소홀했다는 것 말입니다.
직무유기...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글을 쓰지 않더라고 좋아하는 칼럼을 읽지 못한 것은 공짜독자로의 '아주 못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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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세월이 꽤 지났지만
'대구 지하철 사고'는 고통과 충격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 곳에 속해 있었던 사람처럼 뼈와 살이 타는
것 같다고들 합니다.
죽은 이에겐 끔찍한 고통이었겠지만 살아있는 가족들과 이웃들에겐 평생동안의 쓰라린
슬픔일 것입니다.
문득, 살아있는 것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은 이와 살아있는 그 가족과 친지에게 '죄스럽고 황송'했습니다.
살아있는 자로서 '미안(未安)'이라는 단어만으론 부족하군요. ...
'죄송(罪悚)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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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未安)'과
'죄송(罪悚)' 두 낱말을 모두 쓸 수 밖에 없는 대상이 있습니다.
늘, 기다려주시고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분 바로
하나님입니다.
'미안(未安)하고 죄송(罪悚)합니다...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