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크리스천

우연같은 필연

malmiama 2004. 10. 18. 14:57

세 번째 아이 유민이는 요즘도 변함없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자 결실입니다. 
그 결실은 너구리와 달팽이의 만남에서 시작되었지요.  과정을 다시 찾았습니다.        

 

<제200호> 우연 같은 필연    2001년 0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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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습니다. 초가을 없이 늦가을로 넘어 간 듯합니다. 겸연쩍은 면이 없
잖아 있긴 하지만 저와 아내의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기적과 같았던 그 사건이 세월이 지남
에 따라 필연으로 맘속에 자리했기에...... 1985년 늦가을로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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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고민의 결론은 <헤어짐>이었다. 이미 그녀도 짐작
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착잡함을 넘어 오히려 담담했다. 오늘 성북역 근처 레스토랑에
서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저녁 7시 30분. 점심 때 하얀 손수건 대신 예쁜 만년필을 이별의 선
물로 준비했고, 흔들릴지도 모르기에 아예 떠올리는 것조차 예방하고자 온종일 정신없이 일
에 매달렸다.

 

퇴근 무렵 하던 일이 끝나지 않아 마무리짓느라 일곱 시가 다 되어 회사를 나왔다. 평소 약
속시간 만큼은 잘 지켰었는데...라는 생각에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서초동에서 성북역까지
30분만에 갈 수는 없겠기에 택시가 낫겠지 싶었다. 그러나 퇴근 시간대라 길이 많이 막혔고
테헤란로를 따라 역삼동쯤 왔을 때 이미 7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늦는다고 미리 연락할
것을... 후회가 되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냥 맘 편히 먹고 잠을 청했다.

 

눈을 감고 머리를 젖히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조용히 운전만 하던 나이 지
긋한 기사 아저씨가 무슨 일 있냐고 묻는다. 지금 그 동안 사귀던 여자와 헤어지기 위해 가
는 길이라고 하자,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웬만하면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하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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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대학 3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나서다. 당시 합창단
단장이었던 나는 오디션을 통해 신입단원을 다 뽑고 나서 추천에 의해 반주자를 특채했는
데, 이때 모셔온 반주자가 기계설계학과 신입생인 바로 그녀였다.

얌전했던 그녀가 2학기부터는 차츰 활기차 보였고, 열심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노래도 잘했
던 그녀는 튀지 않는 성격에 적당한 외모로 남자 선배들이 특별히 사귀고자 애쓴다는 소
문이 이따금 내 귀에도 들리곤 했다.

 

겨울방학 즈음하여 남성복사중창단을 만들었는데 그녀에게 반주를 부탁하게 되었고, 추운
겨울 내내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니며 연습을 하느라 힘들었는데 와중에 그녀는 시린 손
을 녹여가며 열심히 무료봉사를 해 주었기에 모두들 고마워했다.

다시 새 학기가 되어 나는 군 입대를 위해 휴학을 했지만 학과 조교역할을 하면서 학교엔
계속 나왔다. 겨울 내내 연습했던 중창단은 4월초에 발표회를 성황리에 마쳤다.(이후 매년 2
기, 3기로 이어졌다)

 

여름방학 때 거제도로 수련회를 다녀왔고, 이틀 뒤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입대 하루 전날
그녀를 만나 점심을 함께 하며 고마움에 대한 선물도 전했다.

이후 제대하는 날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을 키우게 되었는데......,
제대했을 때 그녀는 4학년이었고, 내가 4학년으로 복학을 하자 그녀는 졸업을 했다. 졸업 후
마장동 못미처 사근동의 모회사 연구소에 취직을 했다.

 

군에 있는 동안 글로 대할 때와 현실에서 만나며 대하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극과 극을 달리는 능력에 독설과 차분함이 트레이드마크인 반면 그녀는, 치우치지 않
은 능력에 예의 바름을 중요시하고 자존심이 무척 강한 편이어서 가끔 서로를 인정하는 데
에 어려움이 생겼다.

 

더군다나 사귐을 알고 있는 그녀의 집안에서는 나와의 사귐을 만류하진 않았지만 좋은 혼처
를 자꾸 찾아 선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흩어져 상처가 심했던 내 집안과 그녀의 집안은 너무도 대조적이었고, 내가 생각해 보
아도 내세울 게 <이 한 몸>뿐인 나를 그녀의 집안에서 쉽사리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한편, 나는 나대로 세상에서의 야망에 더 관심이 많았지 따뜻한 가정을 꾸려야겠다는 조급
함은 없는, 나름대로 떳떳한 사내였다.

 

'그래...누구처럼 한 눈에 반하거나 그대 없이는 못살아도 아니고, 더 깊은 사이가 되기 전에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야......'

그러나 결심을 했음에도 좋았던 일, 즐거웠던 일...그녀보다 나은 여자는 평생 만나기 힘들지
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비겁하게 물러서려 하는 자신에 대한 패배감. 평생에 있어 가
장 큰 실수이면 어쩌나..... 복잡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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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승시켜도 될까요?"

기사 아저씨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학생인 듯한 여자가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들고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아직 영동대교도 건너지 못한 상태. 어차피 늦은 거.... 그러
시라고 하자 차를 세워 방향 타진을 한다. 한양대가 목적지였는데, 영동대교를 건너 직진해
야하는 나와는 달리 좌측으로 꺾어가야 했고, 그렇게 되면 나는 상당히 돌아가야만 했다.

 

"고마워요. 저 야간 다니는데...... 오늘 시험인데 늦었거든요"
뒷자리에 탄 여학생이 묻지도 않았는데 호들갑을 떨며 자신의 얘기를 한다.. 영동대교를 건
너 한양대 앞에 다다랐을 땐 밤 8시... 이미 30분이나 늦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학생들
의 데모로 최루탄 연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차마 그냥 내리게 할 수가 없어서 학교 안에까
지 택시가 들어갔는데......

 

다시 교문 앞으로 나왔을 땐 데모 행렬 때문에 대로를 향할 수가 없었다. 옆의 작은 길로
빠져서 가다보니 길이 막혀있다. 다시 돌아서 꾸불꾸불 길을 따라 생전 처음 보는 주변을
살피며 겨우 2차선 도로를 찾게 되었는데, 어둑함 가운데 어떤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택
시를 잡기 위해 애 쓰는 안타까운 모습이 보였다.

 

이왕 늦은 거 좋은 일이나 해봐?........택시는 다시 여자 앞에 멈추었다.

 

그런데, 그런데 세상에 이럴 수가! 그 여자는 오늘 만나기로 한 바로 그녀였다. 그때 시간은
8시 20분...약속시간 5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그곳은 사근동이었다.
그 길로 갈 생각도 계획도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그리고 이 시간에 어떻게? 기사 아저씨도

놀라운 사실에 흥분하는 기색이다.  일단 택시에 오른 그녀.
성북역으로 갈 이유가 없어졌지만 약속장소로 택시는 여유 있게 향했고......

 

그 날 따라 그녀도 약속 시간보다 늦게 퇴근을 하게 되어 당황하고 초조했다고 한다. 이미
늦은 것도 늦은 거지만 택시를 못 잡아 40 여분이나 기다렸다는 것이다.

 

사정을 아는 택시기사 아저씨는 싱글 벙글이다. 주택복권 일등 당첨보다 힘든 것에 당첨된
기분이란다. 기념으로 택시비를 안 받겠단다.  그렇다고.. 내리란 말도 안 한다.^^ 성북역에

도착해서 택시비는 물론 그녀에게 주려했던 만년필도 드렸다.

 

약속 장소에 나란히 들어갔다. 시간을 볼 필요도 미안하거나 조급함도 없이.

그 날 헤어지기 위한 만남은 <결혼을 약속한 만남>이 되었다.